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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게 진실일까?

무리수 때문에 죽은 피타고라스

 

 

 

<지식을 갈망한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BC 580~495)는 그리스 사모스 섬(현재 터키에 인접해있는 그리스섬)에서 태어났다. 지중해 및 에게 해 근처에서 무역에 종사한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므네사르코스) 덕에 음악, 그림, 운동 등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상인인 아버지와 함께 긴 여정을 다니며 세상을 배웠다. 젊었을 때는 올림픽에도 출전해서 판크라티온 경기(현대의 종합격투기)에서 우승을 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신비주의 철학자였던 페렉키데스로 부터 우주의 창조자는 모든 물질을 서로 반대되는 근원 재료를 결합하여 섞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는 가르침을 배웠고 이는 후에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보는 '두 세계 이론'의 창시로 이어지고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된 교리 중 하나인 윤회 사상의 바탕이 된다.

피타고라스는 당시 첨단 도시였던 밀레토스로 가서 철학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BC 625~546)와 아낙시만드로스(BC 610~546) 아래에서 논증 수학을 통해 비판하고 검증하며 의문을 가지는 사고를 배우고 다양한 최신 지식들을 배우게 되는데 이는 피타고라스가 후에 수학적 업적을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후 탈레스의 추천으로 피타고라스는 당시 가장 오래된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로 유학을 떠난다. 피타고라스는 23년 동안 나일 강 주변의 여러 신전을 다니며 멤피스(고대 이집트 수도)의 사제들에게 기하학과 천문학 등을 배우게 되고 그들의 신비사상에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물리적 세계와 신비적 세계를 연결하면 지식이 권력으로 그리고 신화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정치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큰 명성을 얻는 꿈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공하여 학자들을 끌고 바빌로니아로 갈 때 피타고라스도 같이 끌려가 감금되면서 그는 큰 시련에 빠지게 되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에 의해 곧 풀려나면서 오히려 그 시련이 당시 동양문명의 중심지였던 바빌로니아까지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피타고라스는 바빌로니아에서 풀려난 후에도 12년동안 머물면서 동방을 지식을 얻게 되고 (인도도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로인해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지식인이 된다.

 

 

 

 


<지식으로 명성을 얻고 싶었던 피타고라스>

유학길에 오른지 40년 만인 그의 나이 약 60세에 그가 그동안 얻은 지식으로 남다른 명성을 얻고 싶었던 피타고라스는 그의 고향 사모스 섬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사모스 섬에는 당시 그리스의 최강대국 스파르타와의 전쟁에도 승리하며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가진 독재자 폴리크라테스가 자리잡고 있어서 피타고라스가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속된 권력을 추구하던 폴리크라테스에게 신진철학자들은 눈엣가시였고 탄압에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32년 짐을 싸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있는 당시 의학으로 유명한 신흥 도시였던 크로토네로 떠난다. 게다가 크로토네는 동방과 서방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기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익힌 피타고라스의 다양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피타고라스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잘나가는 철학자나 정치가로 키웠는데 배출된 제자들이 크로토네를 비롯해 인근 도시에 주요직을 차지함으로써 그 세가 커져 피타고라스 학파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발달한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굉장히 폐쇄적이었는데 학교 입학에 실패한 한 학생이 거짓소문을 퍼트렸고 크로토네 시민들은 피타고라스 학교를 불지르고 제자들을 살해합니다. 제자들의 보호로 가까스로 피타고라스는 메타폰툼으로 피신하지만 얼마 후 죽는다.

 

 

 



<종교가 된 피타고라스 철학 "만물은 수">

피타고라스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끝낼 '명료한 학문'을 추구했다. 그는 세상을 수로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답보다 질문의 지속을 열망하는 자연철학과는 달리 수는 명확한 답을 준다고 생각했고 답이 없는 인생에 수가 명확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종교적 구원을 줄거라고 민중들을 유혹했다. 정확한 수를 추종했기에 자유로웠던 그리스의 분위기와 달리 피타고라스 학파의 교리는 융통성이 없었고 굉장히 억압적이고 금욕적이었다. 게다가 매우 폐쇄적이어서 내부 정보를 외부로 누설할 경우 바다에 빠뜨려 사형시켰다. 또 한편으로 피타고라스는 명확성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지식으로 권력을 가지는 것을 넘어 자신을 신격화하길 원했다. 아폰론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했고 자신의 허벅지가 황금으로 되어있다거나 여러 장소에 동시나 나타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럼에도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수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기하학(도형)을 수로 표현하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 덕에 우리는 공간을 데이터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여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우주로 우주선도 보내고 자율주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2. 피타고라스의 '두 세계 이론'은 세계를 '감각되는 현상계'와 '관조되는 실재계'로 둘로 나눈 첫번째 시도였다. 

3. 피타고라스는 수 자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정수론을 발전시켰다. 1~10까지 모든 기수에 각기 특별한 힘과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Ⅰ-모든 것의 기원 Ⅱ-분열과 대칭 Ⅲ-최초의 수이자 가장 오래된 수 Ⅳ-정의와 질서 Ⅴ-남성과 여성,결혼 Ⅵ-건강과 균형,사랑 Ⅶ-자연에서의 질서 Ⅷ-안정과 조화 Ⅸ-수평선,종착역 Ⅹ-완성과 새로운 시작

간단한 것, 아름다운 것, 조화가 잡힌 것에도 이름을 붙였는데 대표적으로 홀수, 짝수, 소수, 서로소인 수, 과잉수, 완전수, 부족수, 친화수 등이 있다. 

수를 도형과도 결부시켰다. 삼각수(1,3,6,10...), 사각수(1,4,9,16...), 오각수, 육각수... 

피타고라스의 정수에 대한 연구는 수학의 제반 이론에 기초가 된다.

4. 정오각형의 각 꼭지점에서 대각선을 그어 별을 만들면 대각선이 짧은 선과 긴선으로 나뉘는데 그 비율이 1:1.618로 가장 균형적이고 이상적이라하여 황금비라 한다. 정오각형 모양의 별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휘장일 정도로 피타고라스는 황금비를 신봉했다. 황금비는 오래전부터 건축,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꽃과 잎, 나비, 신체 등 자연의 많은 부분도 황금비로 이루어져 있다. 

5. 물체가 내는 음을 자연수의 일정한 비의 법칙으로 수학적으로 표현했다. 

1 8/9 64/81 3/4 2/3 16/27 128/243 1/2

6.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지구가 자전함으로써 낮과 밤이 생기고 기울어진 채로 자전하기 때문에 계절의 발생한다는 것도 설명했다. 

 

 

 

 

 

 


 

 

<피타고라스를 죽인 무리수>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본질을 숫자로 모두 알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모여서 피타고라스 학파를 형성하게 되는데 매우 광적으로 숫자를 숭배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정수로 표현할 수 있는 '유리수'에만 한정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피타고라스 제자 히파수스가 "각 변의 길이가 1인 직각 삼각형의 가장 긴 변은 무리수인 '2'다."라며 정수만을 숫자로 인정한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a2=b2+c2) 를 사용하여 무리수의 존재를 주장한다. 유리수만을 믿는 피타고라스라는 종교에 무리수는 있어서는 안되는 수였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히파수스를 지중해 한가운데에 그를 밀어 넣어 죽인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계속된 무리수들은 결국 피타고라스 학파를 파멸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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