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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게 진실일까?

모비딕의 실화, 에식스호 이야기 (The Tragedy of the Whaleship Essex)

 

 

 

<고래잡이 선 에식스호>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에식스 호는 매사추세츠주 에임스버리에서 만들어졌다. 3개의 돛대가 달린 이 배는 특히 강하기로 유명한 흰 오크나무로 만들어졌고, 크기는 87피트(26.5미터)였다. 1799년 에식스호는 진수되었고, 에식스호는 상선으로 사용되다 포경선으로 개조되어 당시 미국의 포경 수도로 여겨지는 낸터킷에 근거지를 두게 된다. 

 

선폭 7.23m
흘수 3.96m
전장 26.5m
무게 238톤

 

 

<당시 포경산업>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고 있는 미국에게 고래는 매우 가치있는 상품이었다. 그 당시엔 전기가 없어서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이 필요했는데 고래에서 나온 기름이 도시에 불을 밝히고 기계를 윤활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요가 엄청났다. 그래서 포경산업은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산업 중 하나가 되었고 수백 척의 배들이 고래를 찾아 바다를 배회했다. 그 중 향유고래에서 나오는 기름 '향유'가 최고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향유고래를 잡기위해 포경선에 몸을 실었다.

 

향유고래 크기

 

 

 

 

<고래잡는 방법>

19세기 초, 고래잡이는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고래가 발견되면, 약 7.5 미터 크기의 고래 보트들을 바다에 내리고 각 보트당 약 6명의 선원들이 타고 노를 저어 고래에 접근했다. 작살을 던질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게 되면, 밧줄에 연결된 작살을 던졌다. 작살에 맞은 고래가 밧줄이 묶인 고래보트를 끌고 다니다 지쳐서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선원들은 창으로 그것을 죽이고 나서 모선으로 견인했고, 그곳에서 기름 등 고래로부터 필요한 부분을 수확했다. 고래들이 반격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비극의 에식스호>

1819년 8월 12일 에식스호는 낸터킷에서 출항한다. 마지막 항해 당시 이미 에식스는 건조된 지 20년이나 되었지만 이전 항해들에서 너무나 많은 이윤을 남겼기 때문에 운이 좋은 배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에식스호는 최근에 완전히 개조되었지만 전장이 26.5m로 포경선 치고는 작은 배였다. 출발한지 이틀 후, 스콜(열대 지방에서 대류에 의해 나타나는 세찬 소나기. 강풍, 천둥, 번개 따위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을 만나 하마터면 가라앉을 뻔했다. 돛의 일부를 잃었고 2대의 고래보트가 파손 되었지만 선장 조지 폴라드는 낸터킷로 돌아가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에식스호는 5주 정도 이동한 후에야 남아메리카 최남단 혼곶을 지나는데, 그것은 예상보다 매우 느린 속도였다. 선원들은 출발할 때 겪었던 사고와 늦어지는 항해를 엮어 불길한 징조라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혼곶에서 적도 지역인 당시 스페인령의 에콰도르의 아타카메스까지 남아메리카 서부해안을 따라 북으로 이동하면서 따뜻한 남태평양 바다에서의 긴 봄과 여름 동안 사냥을 시작하며 선원들의 기세가 일시적으로 올라가지만 곧 그 지역의 고래가 씨가 말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1820년 8월 심지어 선원 중 한 명(헨리 드윗)이 아타카메스 정박 중에 도망을 가 총 선원이 20명으로 줄게 되었다. 이제 3개의 고래보트에 6명 씩 타고 고래사냥에 나서면 에식스호에 2명 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에식스호 정도의 크기의 배를 안전하게 통제하기에는 충분한 인원이 아니었다. 아타카메스에서 다른 배의 선원들로부터 남위 5도에서 10도 사이, 서경 105도에서 125도 사이, 남쪽과 서쪽으로 약 2,500해리(4,600km)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피해 고래들이 모여산다는 새로운 고래서식지에 대해 듣게 된다. 포경업자들에게 알려져있는 해안과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그 주변 섬들에서 식인종들이 산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선장 폴라드와 일등 항해사 체이스는 긴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1820년 10월 에식스호는 먼저 갈라파고스 제도에 있는 찰스섬(후에 플로레아나 섬으로 개명)과 후드섬(후에 에스파뇰 섬으로 개명)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 정박하면서 긴 여행을 대비해 배도 수리하고 비축식량으로 거북이 360마리를 잡는다. 에식스호는 마침내 남아메리카 해안에서 수천킬로 떨어진 어장에 도착하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고래를 찾지 못한다. 선원들이 실망할 때 쯤, 1820년 11월 16일 마침내 고래를 발견하지만 고래가 체이스의 보트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다. 1820년 11월 20일 향유고래 떼를 발견하고 고래를 보트들이 쫓지만 작살에 맞은 고래가 몸부림치며 꼬리로 보트를 치는 바람에 보트의 이음새가 벌어져 수리를 위해 에식스호로 돌아간다. 체이스의 보트를 수리하던 중 일반 향유고래보다 훨씬 큰 26m크기의 향유고래를 발견한다. 그 고래는 가만히 떠 있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배를 향해 헤엄을 쳐 에식스호를 들이 받는다. 놀란듯 잠시 움직임이 없던 그 큰 고래는 금새 정신을 차리고 배를 다시 들이 받는다. 그리고 에식스호는 바다 아래로 가라 앉는다. 

 

 

 

<에식스호를 침몰시킨 모카딕>

19세기 경, 칠레 남부의 모카섬 인근에서 살던 모카 딕(Mocha Dick)이라는 난폭하기로 악명 높은 향유고래가 있었다. 최초의 목격담은 1810년 이전으로 알려지며 1820년에 서경 119'의 적도 바로 남쪽에서 미국 포경선 에식스 호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모카딕은 일반 고래들하곤 다른 행동거지를 보였다는데 보통 포경선을 보면 도망가는 일반 고래들과는 달리 모카딕은 도망가지 않고 마치 다른 고래들을 지켜주려는 듯 꼬리 지느러미나 몸통박치기로 작살 던지는것을 방해하거나 배를 공격하였고 보통 일반 고래들이 물줄기를 대각선으로 얕게 뿜던것에 비해 모카딕은 마치 복싱선수가 호흡하듯 일정한 간격을 둔 높은 물줄기를 수직으로 뿜어댔다고 한다. 몸길이는 70피트 (21.3미터)가 넘었다고 하며 이후 전세계 포경 업계에 모카딕의 악명이 널리 퍼지면서 수많은 포경선들이 이 흰고래를 잡아보겠다고 모카 섬으로 몰려들었다. 1839년 미국에서 모카딕에 대한 책이 출판되면서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1838년 포경선의 공격으로 죽어가던 고래들을 도와주려다 결국 작살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모카딕을 해체했을 때 몸에 19개의 작살과 엄청난 양의 고래기름 용연향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모카딕에 대한 목격담이 올라온다. 최후의 목격담은 1902년이다. 포르투갈 아조레스 군도 인근에서 알비노 향유고래 한마리가 잡혔는데 이빨의 갯수로 가늠해본 결과 100살~200살 가량은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에식스호의 선원들 그리고 생존자>

선원들의 수는 총 21명이었다. 선원 중 7명이 (윌리엄 본드, 새뮤얼 리드, 리처드 피터슨, 헨리 드윗, 로슨 토머스, 찰스 쇼터, 이사야 셰퍼드) 흑인이었다. 4명이 (세스 윅스, 조지프 웨스트, 윌리엄 라이트, 아이작 콜) 섬 원주민, 1명이 (토마스 채플) 영국인, 그리고 배의 선장 조지 폴라드, 일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 2등 항해사 매튜 조이, 오벳 헨드릭스, 선실 소년 토마스 니커슨, 바질라이 레이, 찰스 램델, 벤자민 로렌스, 그리고 오언 코핀이 있었다.

1820년 11월 20일 남아메리카 서쪽에서 약 3,700 km나 떨어진 곳에서 공격을 받아 배를 잃은 (사고 전 에콰도르의 아타카메스에서 도망친 헨리 드윗을 제외한) 나머지 20명의 선원들은 물에 잠긴 난파선에서 이틀동안 최대한의 보급품을 구하지만 20명의 선원들이 육지로 여행하게에는 식량과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장 가까운 섬인 마르케사스 섬이 서쪽으로 1,900km 떨어져 있었지만 식인종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동쪽인 남아메리카로 향하는데 무역풍을 거슬러 항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서풍을 타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1,600km를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는 것이 마르케사스로 가는 것 보다 두 배나 더 멀리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원들은 남쪽을 돌아 동쪽으로 가는 먼 항로를 선택한다. 물과 음식이 배급되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음식들이 바닷물에 담가져 있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그 음식들이 갈증을 더 증가시킴을 알았지만 살기위해 먹어야 했다. 2주 정도 지났을 때 선원들은 목마름에 바닷물로 입을 행구고 자신의 소변을 마시면서 버텼다. 선원들이 목마름으로 죽어 가던 때, 고래의 공격을 받은 정확히 한 달 후인 1820년 12월 20일, 현재 영국 영토인 핏케언 제도의 작은 무인도 헨더슨 섬에 도착한다. 핸더슨 섬에서 선원들은 작은 민물샘을 발견했고 새들과 알, 게, 후추풀 들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1주일 후에 그 섬에 있는 식량자원을 다 써버렸다. 1820년 12월 26일 선원들은 섬에서 더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보트를 타고 출항을 준비한다. 1820년 12월 27일 선원들은 3배에 나눠타고 이스터 섬으로 출발하지만 3일 만에 비축해둔 식량을 거의 소진한다. 1821년 1월 4일 그들이 이스터 섬을 지나 남쪽으로 너무 멀리 떠내려갔다고 추청했고 동쪽으로 2,926km, 서쪽으로 674km 떨어진 마사 티에라 섬으로 가기로 결정하지만 굶주린 선원들이 하나 둘 씩 죽기 시작했다. 1821년 1월 10일 낸터킷에서 떠나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2등 항해사 매튜조이가 사망한다. 다음 날 스콜(열대 지방에서 대류에 의해 나타나는 세찬 소나기. 강풍, 천둥, 번개 따위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을 만나면서 체이스의 보트가 다른 배들과 분리되었다. 1821년 1월 18일 삶의 의지를 잃은 최고령 선원인 피터슨이 사망한다. 매튜 조이와 피터슨은 옷으로 꿰매져 바다에 묻혔지만 1821년 2월 8일 아이작 콜이 사망하자 식량이 바닥난 생존자들은 그의 시신을 버리지 않고 논의 끝에 풍습대로 먹기로 결정한다. 헨드릭스의 보트는 1월 14일 식량을 다 써버렸고 폴라드의 보트는 1월 21에 식량이 다 떨어진다. 토마스는 1월 20일, 쇼터는 1월 23일, 세퍼드는 1월 27일, 리드는 1월 28일에 사망한다. 그날 늦게 두 보트는 분리되었고 헨드릭스의 보트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2월 1일 폴라드의 배에 있던 식냥은 다시 떨어졌고 생존자들은 누가 나머지를 위해 희생할지 제비를 뽑았다. 폴라드의 사촌인 18세 오웬 코핀이 흑점이 찍힌 제비를 뽑았고 폴라드는 사촌을 보호하려 했지만 코핀은 거절했고 사형집행자로 뽑힌 거의 친구 찰스 램스델이 코핀에게 총을 쐈다. 2월 11일 레이도 사망하고 남은 여정동안 폴라드와 램스델은 코핀과 레이의 뼈를 갉아먹으며 살아남는다. 2월 15일 체이스의 보트의 생존자 3명은 다시 식량이 바닥났지만 2월 18일 영국 선박 인디언에 의해 침몰한지 89일 만에 구조된다. 폴라드의 배는 그로부터 5일 후 2월 23일 낸터킷 고래선 도핀호에 의해 남아메리가 해안이 거의 보이는 곳에서 구조되었다. 구조당시 폴라드와 램스델은 배가 옆에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해리상태였다. 1821년 4월 5일 핸더슨섬에 남겨진 에식스호 생존자 라이트, 윅스, 채플 또한 구조 된다. 

 

 

 

<고래산업의 쇠퇴>

고래산업은 1850년대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석유산업에 밀려 하향길로 접어든다. 1859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석유가 처음 시추된 후 석유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세계연료 시장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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